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일본 1 (규슈)
목차
차례
'답사기 판형'으로 새 장정본을 펴내며 일본 답사기를 시작하면서 일방적 시각에서 쌍방적 시각으로 규슈 답사
자연 관광과 문화 관광의 어울림
제1부 북부 규슈
요시노가리
빛은 한반도로부터
조몬 토기/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 남내곽과 북내 / 옹관묘열/ 요시노가리 출토 유물 / 여인 수장국 야마타이 / 일본인의 기원 /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히젠 나고야성과 현해탄
현해탄 바닷물은 아픈 역사를 감추고 음악이 있는 답사 / 가라쓰 가는 길 / 히젠 나고야성 /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 / 일본 가요「황성의 달』 / 현해탄의 유래 / 임화의 『현해탄,
가라쓰
일본의 관문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의 흔적들 백제 무령왕의 탄생지, 가카라시마 / 요부코항 / 말로관/ 가라쓰성/ 다카토리 저택/ 무지개 솔밭/ 가가미 신사의 『수원관음도』/ 가라쓰모노
아리타
도자의 신, 조선 도공 이삼평 아리타로 가는 길/ 도산신사 / 도조의 언덕/ 도조 이삼평비/ 이즈미야마의 자석장 / 석장신사의 고려신 / 구다니 가마터 / 이삼평의 묘소
아리타• 이마리
비요(제)의 마을엔 무연고 도공탑이 도자기 전쟁/ 조선 여자 도공 백파선 /
쇄환사 이경직의 『부상록』 / 이마리 비요의 마을/ 도공무연탐/ 고려인의 묘/ 이마리야키/ 이마리 항구 상생교
다케오 • 다자이후
그때 그런 일이 다 있었던 말인가 다케오 온천과 올레 / 미후네산의 낙원 / 혜주원/ 나가사키 만보/
일본의 신사 / 덴만궁의 유래 / 비매(7) / 백제인이 쌓은 수성 / 백촌강 전투 / 대야성 / 다자이후 청사/ 이노우에 야스시의 「풍도(E)』
193
제2부 남부 규슈
가고시마
사쿠라지마의 화산재는 지금도 날리는데
233
가고시마의 풍광/ 시마즈 번주 / 시마즈 요시히로/ 개명 번주 나리아키라 / 상고집성관 / 선암원 / 죽경정 /
사쓰에이 전쟁과 젊은 사쓰마의 군상 / 유신의 고향/ 사이고 다카모리 / 세이난 전쟁 / 가고시마의 화가들 / 사쿠라지마의 화산재
미산마을의 사쓰마야키
267
가고시마의 미산마을/ 시바 료타로의 「어찌 고향이 잊허리오」/ 다치바나의 『서유기』/ 사쓰마야키의 계보/ 심수관 / 박무덕 또는 도고 시게노리/ 미산마을/ 옥산신사 / 박평의 기념비
미야자키 남향촌
거기에 그곳이 있어 나는 간다 기리시마 온천/ 에비노 고원/ 가라쿠니다케(한국악) / 창비 답사 / 남향촌으로 가는 길 / 남향촌 백제마을의 유래/ 남향촌의 전설 / 시와스마쓰리 / 화가들의 그림 부채 /
'유어예(분))'를 위하여
295
부록
답사 일정표와 안내지도 주요 일본어 인명• 지명•사항 표기 일람
남한 면적의 절반 정도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배로 3시간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는 1시간 20분
규슈의 7개 현
- 후쿠오카 (후쿠오카 공항, 기타큐슈 공항)
- 사가 (사가 공항)
- 나가사키 (나가사키 공항, 대마도 공항)
- 구마모토 (구마모토 공항)
- 오이타 (오이타 공항)
- 미야자키 (미야자키 공항)
- 가고시마 (가고시마 공항)
규슈의 공항
- 후쿠오카공항 http://www.fuk-ab.co.jp/ (한국어 있음)
- 키타큐슈공항 http://www.kitakyu-air.jp/ (한국어 있음)
- 사가공항 http://www.pref.saga.lg.jp/web/ariakesaga-ap.html (한국어 있음)
- 나가사키공항 http://www.nabic.co.jp/ (한국어 있음)
- 대마도공항 http://www4.ocn.ne.jp/~tsjapo/
- 아소&구마모토공항(쿠마모토공항) http://www.kmj-ab.co.jp/ (한국어 있음)
- 오이타공항 http://www.oita-airport.jp/ (한국어 있음)
- 가고시마공항 http://www.koj-ab.co.jp/ (한국어
규슈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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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 지도 제작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starillo&logNo=221461461711&navType=by
지도 박사<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지도 제작기 1편>
"지도 박사" 유홍준 선생님이 이렇게 불러 주신다. "경진씨" "김실장님" "작가님"... 각자 부르고 싶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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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북부 규슈
규슈 요시노가리 - 빛은 한반도로부터
요시노가리는 고조선과 삼한 시대 사람들이 집단 이동하여 청동기 문명과 벼농사를 전해주어 일본 역사에서 야요이시대가 열리게 된 현장이며, 조선 도공의 발자취를 따라 가라쓰·아리카로 가는 길목에 있다.
조몬인은 지금의 일본인과는 다른 아이누족의 원조상으로 홋카이도와 사할린에 일부 남아 있다.
조몬 토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주 크고 신비하게 생겼다. 일본 열도는 유실수와 해산물이 풍부한 자연의 풍요 때문에 문명의 발달이 더뎠다. 그러나 수렵과 채취만으로 살기에는 고단한 삶이었고 조직사회를 형성하지 않았는데 기원전 300년 무렵 갑자기 벼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야요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식량을 비축하고 청동기라는 문명적인 금속기를 가용했으며 집단취락을 이루어 힘의 결집이 가능했다. 이런 야요인에게 조몬인은 쫓겨나 홋카이도까지 밀려났다.(아이누족)
야요이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민무늬토기와 비슷한 무문토기가 일본 각지에서 출토되어 이 시기를 야요이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벼농사와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로부터 들어와 농경문화로 야요이인들의 삶이 풍요로워졌고 협동 작업의 필요로 씨족이 무리를 이루며 마을이 생겨났고 초보적인 사회를 구성하였다. 잉여농산물이라는 부가 창출되면서 계급이 생기고, 약탈과 전쟁이 일어나면서 씨족들이 연합하여 부족국가로 발전해갔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온 문명의 혜택을 받아 야요이시대를 열어갔다는 것을 증언하는 곳이 요시노가리 유적이다.
요시노가리 마을 유적은 야요이시대 전 기간의 마을 발전상을 전해주는 유적이다. 지금의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은 후반기인 3세기 경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야요이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출토 유물들은 한반도 유물의 형태 그대로이다. 원삼국시대의 고대국가 탄생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패자들은 신천지를 찾아 떠나 일본까지 건너갔고 이들을 '도래인'이라고 한다. 따라서 요시노가리 답사는 일본 속의 한국 문화 답사이자 우리 청동기시대의 답사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형성에 한반도인의 피가 많이 섞여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기에 이르렀만 당시 야요이문화를 주도한 것이 한반도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공론화되지 않고 있다. 도래인은 귀화인으로 일본인이 되었고 도래인들이 발전시킨 것은 일본 문화지 한국 문화는 아니다.
재레미 다이아몬드도 『총·균·쇠』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분화는 최소 4000년 이상 차이. 그렇다면? 가설 :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고구려어일 가능성.
한반도의 원(原)삼국시대
위만이 고조선을 공격하자, 준은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마한을 개국했다.
이 여파로
부여에서 고구려 건국, 고구려에서 백제 건국.
진한 12개국->6개국(그 중 사로국->신라)
변한에서 가야 6국
** 이 과정에서 밀린 사람들이 규슈로... 즉, 도래인
밭벼->논벼, 모내기 (벼의 수경재배)
한반도 도래인 : 본래 편안히 안정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민을 가지 않는다. 또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이민을 가지 못한다. 잘 살다가 상황의 변화로 몰라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신천지로 가는 것이 이민의 생리다. 한반도의 정세변화는 많은 집단을 이민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일본인의 뿌리는?
원래 일본에 살던 원주민 아이누족이 형성한 문화를 조몬 문화(신석기시대, 약 1만 2천 년 전 ~ B.C 3C)
벼농사와 금속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야요이 문화(청동기시대, B.C 3C ~ A.D 3C)로 교체됩니다.
조몬인은 야요이인에 비해 키가 작고 풍성한 수염과 체모를 갖고 있습니다. (원시인 느낌?)
현대의 일본인은 조몬인보다는 야요이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야요이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를 측량한 결과, 두 가지 유형이 나타나는데요,
바로 140cm 정도의 작은 신장과 사각형의 얼굴형을 가진 조몬인形과 160cm가량의 계란형 긴 얼굴형을 가지고 있는 야요이인形입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과 반복적인 혼혈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012년 일본 국립유전학 연구소의 사이토 나루야(齊蕂成也) 교수팀이 일본 본토인, 중국인, 서구인, 아이누, 오키나와인 등의 DNA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이 같은 설을 더욱 뒷받침해줍니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인 『Journal of Human Genetics』 인터넷 판에 소개되었습니다.
본토(홋카이도, 오키나와 제외) 출신자는 야요이인과의 혼혈 비율이 높다
현재의 일본인은 일본열도의 선주민인 조몬인(繩文人)과 한반도에서 건너온 야요이인(彌生人)과의 혼혈을 반복한 것이라는 유전자 해석 결과가 나왔다.
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의 종합연구대학원(가나가와현) 등이 포함된 연구팀은 이러한 '혼혈설'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를 일본 인류학회가 편집한 국제전문지(저널 오브 휴먼 제네틱스) 인터넷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일본 본토 출신자와 중국인, 유럽인, 미국인 등 약 460명의 DNA 데이터에 아이누 민족과 오키나와 출신자 총 71명을 새로 추가해 분석했다. 이전에도 일본인의 유전자 분석 연구 결과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한 명당 최대 약 90만개소의 DNA를 해석해 신뢰성을 높였다.
그 결과 아이누 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오키나와 출신자, 다음이 본토 출신자로 판명됐다. 본토 출신자는 유전자적으로 한국인과 가까웠다. 이는 일본인 전반이 조몬인 유전자를 계승하는 한편 본토 출신자는 야요이인과의 혼혈 비율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까지 일본인의 기원에 대해 조몬인이 그 자체로 각지의 환경에 적응했다는 '변형설', 야요이인이 조몬인을 정복하고 정착했다는 '인종 치환설', 열도의 선주민과 한반도 도래인의 혼혈이라는 '혼혈설' 등이 제기돼 왔다.
종합연구대학원대의 사이토 나루야 교수는 "DNA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혼혈설의 시나리오에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연구팀은 앞으로 조몬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의 DNA를 분석해 일본인의 '뿌리 찾기'를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히젠 나고야성과 현해탄 - 현해탄 바닷물은 아픈 역사를 감추고
부산과의 거리가 가깝고 항구로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히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거대한 나고야성을 축조하였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도적인 파괴로 지금은 방대한 폐허다. 전투기지가 아니라 침략의 거점이었으므로 방어 기능보다는 위세를 보여주기 위한 특징이 많다.
가라쓰 - 일본의 관문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의 흔적들
히젠 나고야성에서는 백제 무령왕의 탄생지인 가카라시마가 펼쳐져 보인다. 무령왕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에 있고 여러 정황들로 보아 사실로 밝혀졌다.
가라쓰는 오랫동안 한반도와 뱃길로 이어졌던 일본의 관문이었다. 그러다 정치적 지형이 바뀐 7세기 아스카시대가 되면 일본 역도에서 한국과 중국으로 향한 관문은 오사카로 옮겨진다.
가라쓰가 다시 일본 역사에서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히젠 나고야성을 쌓게 된 후이고, 전쟁 이후 가라쓰에 가라쓰번이 자리 잡게 된다.
가라쓰에는 일본 근대 건축으로서 디자인이 뛰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구 다카토리 저택'이 있어 일본 근대의 정서와 정신을 읽어볼 수 있다. 백만 그루의 해송이 심어져 있는 무지개 솔밭은 대단한 방풍 효과가 있다.
가가미 신사에는 고려 불화인 「수월관음도」가 있다. 이 불화는 고려 불화 중에서 유일하게 높이 4미터가 넘는 대작이다. 아마 왜구에 의해 노략질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라쓰가 오늘날 내세우는 최고의 유산은 가라쓰야키라 불리는 도자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분청사기 기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이를 일본식으로 변화·발전시켰으며, 가마마다 다양한 특징을 갖고 발전했다. 우리는 고유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고, 일본은 그 고유 기술을 통째로 가져가 자신들의 위대한 도자가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아리타 - 도자의 신, 조선 도공 이삼평
아리타는 구로카미산 심심산골 속 제법 넓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고을이다. 정유재란 때 나베시마 번주에게 끌려온 이삼평은 아리타에 와서 도자기 가마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가나가에 산페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자기 생산을 위한 흙을 찾던 그는 아리타 동쪽 이즈미야마에서 양질의 고령토 광산을 발견하고 그 건너편 시라카와 계곡가에 '덴구다니 가마'를 열어 일본 최초의 백자를 생산해냈다. 이삼평이 가마를 연 지 300주년이 되던 1917년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고 도신신사에 모셔졌다. 이삼평의 묘소는 덴구다니 가마 부근에서 묘석의 아랫부분이 발견되어 시라카와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아라타 백자의 중요한 가마 두 군데는 천왕가를 위해 백자를 만들었던 가키에몬과 번주를 위한 관요였던 나베시마 자기다. 명청 교체의 혼란기에 아리타야키가 이마리항을 통해 유럽으로 일본의 최초의 자기 수출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아리타야키는 이마리야키라고 불렸다. 이런 사정으로 이마리야키는 유럽식 중국풍을 띠게 되었는데, 수출 자기인 관계로 일본 내에 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최근 일본의 박물관들이 유럽에서 이마리야키를 역수입해왔다. 이 세 종류의 도자기들이 규슈 도자 문화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신신사는 사가번의 초대 번주인 나베시마 마오시계와 도조 이삼평을 기존의 오진 왕과 함께 모시면서 이름이 도신신사가 되었고, 본정에 이르는 길에 우리의 홍살문과 비슷한 도리이, 수호신으로 고려견이라고도 하는 당사자처럼 생긴 고마이누, 봉헌으로 세워진 도로, 경배하기 전에 손과 입을 씻는 데미즈야가 모두 청화백자로 만들어져 있어 도자기 고을임을 자랑하고 있다. 경내에는 이삼평을 도조로 추앙하는 것을 추진한 후카가와의 동상이 있고, 그 뒤에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유명한 방랑 시인인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일본 정형시) 「달맞이 언덕」 비가 있다.
도신신사에서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오르면 큰 길과 만나고 거기서 더 올라가면 비탈진 돌길 위쪽으로 오벨리스크 모양의 '도조 이삼평 비'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이곳을 '도조의 언덕'이라고 한다.
아리타 마을 외곽이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즈미야마의 자석장은 400년에 걸쳐 하나의 산을 도자기로 변화시켰다는 말처럼 산을 파내려 간 장대한 구덩이를 보여준다. 이 자석장 바로 곁 산모롱이에 석장신가가 있는데 자석장이 발견된 후에 도공과 광산 석공이 새운 작은 마을 신사다. 본전 왼쪽의 작은 목조건물에 이삼평 조각상이 모셔져있다. 말쑥한 한복 차림을 백자로 제작하여 품위가 있고 거룩함보다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이곳에서 자석장으로 가는 오솔길 초입에 계란 모양의 큼직한 자연석에 '고려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른바 석신으로 돌 자체가 신상이다.
아리타·이마리 - 비요(秘窯)의 마을엔 무연고 도공탑이
임진왜란 때 이삼평, 우칠(나카자토), 심당길, 박평의 외에도 수천의 도공들을 집중적으로 데려가 도기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고 다회가 최고급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한 일본에 조선 도공들이 만들어낸 도자기들은 가라쓰 항구를 통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 일본의 생활문화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것이 '가라쓰모노'라 불리는 것이다.
구마코토의 '아가노야키'는 존해(아가노 기조타쿠니)가 열었고, 야마구치의 '하기야키'는 이작광과 이경 형제에 의해 시작된 가마로 어용 가마가 되어 지금까지 전통을 유지하고 있고, 오이타의 '다카토리야키'는 팔산이 아들과 함께 열었고, 그 밖에도 구마모토의 '쇼다이야키'는 가토 기요마사가 데려온 도공에 의해 처음 열린 것이다. 김태도라는 도공이 다케오에 가마를 열어 널리 퍼졌는데, 그가 죽자 그의 부인인 백파선이 아리타로 옮겨와 가마를 열었다. 아리타의 보은사에 백파선의 법탑이 있다.
좋은 노동조건과 장인으로서 전문가 대접을 받아 성공적으로 가마를 열었고 좋은 도자기에 대한 열망이라는 소비문화가 뒷받침되어 일본이 세계 도자 시장을 석권하는 힘이 되었다. 조선도 쇄환사를 통해 피로인들을 다시 고국에 데려오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하지만 많은 정착 귀화인들은 돌아오기를 꺼려 했다는 것을 이경직의 「부상록」으로 알 수 있다.
이마리에는 아리타야키가 수출된 항구인 상생교와 나베시마 가마 유적과 오늘날의 이마리야키를 볼 수 있는 '비요의 마을'이 있다. 비요의 마을에는 '도공무연탑'과 '매화 동산'에 '고려인의 비'가 있어 조선 도공의 자취를 맛볼 수 있다.
다케오·다자이후 - 그때 그런 일이 다 있었단 말인가
다케오 온천은 1300년 전 기록인 『히젠국 풍토기』에 나올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었고 여러 명사들이 다녀간 곳이다. 이곳에는 제주올레를 본뜬 '규슈 올레'의 도착점인 '다케오 올레'가 있다. 일본은 그네들의 삶을 살지게 한다면 어느 나라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도입하는 개방적이고 실질적인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마후네산 기슭에 있는 19세기에 조성된 낙원과 20세기에 조성된 혜주원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이 『일본의 정원 100선』에 선정되었다.
덴만궁을 가기 위해 우선 일본의 신사에 대해 알아본다. 일본의 신사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이고, 신도는 일본인들의 민족 신앙으로 정신생활의 기반이다. 그러나 신도에는 교조도 경전도 없다. 체계적인 종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종의 전통문화다. 일본 신 중 최고위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신 이세신궁이 일본 신사의 총본산이고, 하치만 대신이라는 무신을 모시는 하치만궁과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라는 실존 인물을 사후 천신으로 신격화해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덴만궁은 워낙 인기 있는 신을 모시고 있어 전국에 퍼져 있어서 두 궁 앞에는 지명을 붙여서 부른다. 디자이후 덴만궁이 덴만궁의 총본산으로 가장 유명하고 유일하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미즈키'라 불리는 수성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혈전인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왜와 백제가 나당연합군이 뒤쫓아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서 쌓은 백제식 토성이다. 이를 계기로 왜는 강성한 율령국가로 나아가는 데 박차를 가해 다이호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천황제를 확립하고 나라 이름도 '일본'이라고 부르며 비로소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우리가 삼국시대라 부르는 시기는 사실상 오국시대였다. 수성은 해자를 평소에는 비워두었다가 공격을 받으면 안쪽의 바깥쪽으로 흘려보내 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구조였다. 다자이후 청사는 수성과 대야성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다자이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의 하나는 몽골의 침입이다. 일본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으나 몽골군은 육지에 진을 치지 않고 배에서 숙박을 하였는데 밤 사이 폭풍이 몰아쳐 전함들이 모두 침몰해버렸다. 일본인들은 이 폭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른다.
제2부 남부 규슈
가고시마 - 사쿠라지마의 화산재는 지금도 날리는데
옛 지명이 사쓰마인 가고시마의 유형 문화유산은 조선 도공이 사쓰마야키를 연 미산마을과 이 지역을 통치하던 시마즈 가문의 별저인 선암원 외에는 특별히 꼽을 만한 것이 없다. 그 대신 일본 근대사에서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그들의 자취는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가고시마의 모든 역사적 영광은 사쓰마번을 다스려온 시마즈 가문에서 나왔다. 정유재란 때 박평의와 심당길을 끌고 간 시마즈 요시히로, 선암원을 지은 미쓰히사, 개명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이다. 나리아키아는 선암원 곁에 근대식 공업 단지로 훗날 상고집성관이라 불리는 집성관을 조성하고 이양선을 건조하여 일장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영국과의 사쓰에이 전쟁 때 집성관은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영구에 패한 뒤 새 번주로 취임한 다다요시가 집성관을 재건하여 지그 남아 있는 본관인 기계공장을 준공하였다.
선암원은 시마즈가의 역대 당주를 모신 쓰로가네 신사 왼쪽에 있고, 신사 오른쪽에는 상고집성관이 있다. 선암원의 철대포는 사쓰마번에서 제조한 최대급 요새포를 충실히 복원한 것으로 사쓰마번 근대성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이 철대포 위쪽에 이 대포를 만들던 반사로 방법을 이용한 용광로가 있는데, 이는 근대산업 기반 시설 구축을 의미한다. 어전은 쓰루마루조라는 미칭이 있는 가고시마성에 거주하던 번주가 그곳이 폐성이 되면서 지어 거주하던 곳으로 가고시마성에 있던 것과 똑같다고 한다. 선암원의 정원적 가치는 어전 안에서 바라보는 사쿠라지마의 환상적인 풍광에 있다. 이 정원의 기본 개념은 차경이다.
메이지시대의 인물들이 나고 자란 곳인 가고시마가 메이지유신의 고향임을 자랑하는 역사공원이 있다. 가고시마 시내에 있는 시로야마 공원에는 마지막 사무라이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있어 그의 메이지유신 선포를 위해 공헌과 세이난 전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예술에서도 가고시마는 근대 일본의 선구였다. 일본 서양화단에 첫 번째 등장하는 대가인 구로다 세이키가 이곳 출신이다. 그 외에도 도코나미 마사요시, 와다 에이사쿠 등이 있다.
지금도 가고시마엔 사쿠라지마의 화산재가 하루에도 두세 차례 떨어진다고 한다.
미산 마을의 사쓰마야키 - 고향난망(故鄕難忘)
가고시마가 한국인에게 남다른 고장인 것은 조선 도공이 사쓰마야키를 개척한 미산마을(미야마)이 있기 때문이다. 심당길의 후손 심수관은 지금도 당당하게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자랑하며 사쓰마야키 가마를 대대로 이어가고 있고, 박평의의 후손들은 일본인으로 완전히 귀화하여 일본 외교가의 명문으로 변신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어찌 고향이 잊히리오」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지금도 구시키노 항구 시마비라 신사 입구에는 이들을 포함한 조선 도공들이 처음 표착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원주민의 방해로 살 수 없게 된 그들은 사쓰마번에 탄원하고자 가던 중 미산마을 근처에 도착하자 그곳이 자신들의 고향인 남원과 비슷하다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곳에 옥산궁을 지어 단군을 모시고 고국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도쿠가와와의 전투가 끝난 후 시마즈 요시히로 번주는 그제야 이들을 찾은 다음 특명을 내려 이들에게 영지와 녹을 내리고 사무라이 계급과 동등한 대우를 하게 하여 안정된 삶 속에서 도자기 제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이들의 노력으로 여러 계열의 사쓰마 백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역대 번주들의 적극적 지원으로 조선백자에 기반을 두면서 일본 각지의 유행과 기법을 모두 수용하는 다채로운 사쓰마야키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번요가 폐쇄되자 이들의 생활은 궁핍해지고 박씨와 심씨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 도공의 자취가 서려 있는 미산마을은 지금도 도자 마을로 10여 개의 가마가 들어서 있다. 심수관가는 25명의 도공이 일하고 있고, 공방 한쪽에는 그 옛날의 노보리 가마가 남아 있고, 전시관에는 사쓰마야키의 역사와 역대 심수관의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박평의의 후손인 도고 시게노리의 기념관에는 그의 선조들이 일하던 노보리 가마터가 있고, 홀에는 그의 옥중 쉬와 각종 팸플릿도 있다.
조선 도공들이 단군을 모시던 옥산궁은 일본 신사 모양으로 개조되어 이름도 옥산신사로 바뀌어 옥산궁이 가졌을 풍미는 사라지고 없다. 마을 입구 공동묘지에는 박평의 기념비가 있어 귀화는 하지만 조상을 잊은 것은 아니라는 마음의 징표였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미야자키 남향촌 - 거기에 그곳이 있어 나는 간다
남향촌이 백제마을로 조성된 근거가 1천 년을 두고 행해져온 시와스마쓰리라고 불리는 사주제였다. 이 마쓰리의 민속학적 가치와 의의를 학자들 모두 높이 인정하고 있다.
남향촌 가는 노정에 있는 에비노 고원의 주차장에서 보이는 산이 한국악이다. 초대 천왕 진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다카치호로 유력하게 지목되는 곳인 다카치호봉이 한국악 바로 옆에 있고, 『고사기』에 있는 신화에 '한국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천손강림이 단군신화와 비슷하고 김수로왕의 7왕자 이야기와도 비슷하여 신화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남향촌을 백제 마을로 조성하게 된 근거는 백제인에 대한 전설에서 나온 시와스마쓰리이다. 사주제는 음력 12월에 아들 복지왕의 신주를 모신 제관 일행이 히키 신사를 출발하여 80킬로미터 떨어진 남향촌의 미카도 신사에서 아버지 정가왕을 만나고 돌아가는 축제로 예전에는 9박 10일, 현재는 2박 3일 열리는데 부여의 은산별신굿, 청양 정산의 동화제, 공주 탄천의 대보름제 등 백제 고토의 민속과 유사한 점이 많음이 고증되었다. 유물들은 백제와는 큰 관계가 없어 보이고 백제마을의 건물과 간판만 백제의 분위기를 따랐을 뿐 백제의 향기를 느낄 수는 없다.